﻿마이클 만Michael Mann이 영화화하려 했던 토머스 페니모어 쿠퍼의 [모히칸 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딱히 새로울게 없는, 다소 구태의연한 영화 소재였다. (물론 제작사인 20세기폭스사(社)는 아주 그럴듯한 대작영화Epic Movie를 하나 만들자.. 라는 심산이었겠지만) 이는 책이 발간되던 당시 엄청난 인기작가였던 쿠퍼의 아우라가 시간이 흘러가며 '상대적으로 빠르게' 사그러 들었던 탓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만은 자신의 유년시절에도, 영화의 제작준비 과정에서도, 또 노스캐롤라이나주(州)의 울창한 삼림 속에서 촬영에 여념이 없던 때에도 원작을 손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원작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다. =_=;)

극단적으로 원작을 무시했던 그의 이런 태도는 원작자에 대해 예의 바르기 짝이 없는 요근래의 헐리웃의 분위기와 비교해도 완전히 다른 세상의 것이었는데, 생전의 쿠퍼가 만의 영화를 보다 분노에 휩싸여 자신이 애용하던 윈체스터 장총을 들고 영화사에 난입 했다면, 아마 볼만 했을 것이다. 물론 쿠퍼가 시간여행을 했다는 가정에서나 될법한 얘기겠지만.

애초부터 만은 원작의 줄거리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놀랄만큼 참신한 대체 시나리오가 준비된 것도 아니었다. [모히칸 족의 최후]는 수차례의 영화화를 위해 매번 당시 백인 관객들의 입맛에 맞게 적당히 손질되었는데, 만의 92년 버전은 이전의 여러 선배들 중 하나와 줄거리가 일치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만은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그는 굳이 쿠퍼가 아니라 도봉구 쌍문동의 고길동씨가 쓴 각본이라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가 정말로 원하는 요소가 시나리오에 있다면 말이지.

평론가 김영진은 만의 영화적 특징으로, "별볼일 없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낸다"를 꼽았는데, 어찌보면 이 것은 만에 대한 일반 대중의 느낌을 가장 적확하게 잡아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이 원했던 것은 대자연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교감하며 이런저런 드라마를 쏟아내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때문에 원작의 드라마적 요소들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울창한 삼림 속에서 (주로 남자인) 인간들이 벌어지는 지극히 원시적인 살육과 생존의 재현에 진력했다.

물론 촬영감독 단테 스피노티가 유려하게 찍어낸 미국 중부의 원시림 풍경은 그 자체로 뛰어난 풍경화였지만, 만이 묘사하는 자연은 그늘진 숲 속 어딘가에서 전투용 손도끼를 든 누군가가 조용히 내 뒤를 쫓는 가운데 그 배경으로 펼쳐진 자연이었다. 여기에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쿠퍼의 원작이 바탕으로 깔고 있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이던 장면이 재현된다. 아마 만의 성격상, 그의 시선과 온 정신은 이 부분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서사적 측면에서의 구태의연함은 약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은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적 특징으로 "Contemporary" 라는 측면을 꼽았는데, 단순한 영한 사전식 번역을 배제한다면 이 표현은 상당히 흥미롭다. 즉, 만의 영화는 과거나 현재나, 혹은 미래의 그 어떤 사건이라도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는 이로 하여금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로서 기능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누군가 만에게, 당신 영화는 이야기가 구려... 라고 말한다면, 만은 발끈해서 내뱉을 것이다. "당신은 다큐멘터리 볼 때 줄거리 따지며 보나?"


결과물로서 비교할 때, 만의 이 영화는 16세기판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 칭할 법한 리얼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현대식 총기에 익숙한 액션물 전문(?) 관객들은 둔탁한 도끼와 구식 플린트락 머스켓총이 주는 날 것의 신선함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일반 (미국인) 관객들은 우리네 홍길동 이야기처럼 쿠퍼의 모험담에 익숙한 탓에 부담없이 등장인물 간의 로맨스를 받아들이며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다. 물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이런 식의 평면적인 캐릭터에는 배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난 것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또 사운드트랙 역시 훌륭한데, 사람들이 마이클 만의 영화중 가장 뛰어난 앨범을 꼽는다면 이 영화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 모든 혼합물들은 영화의 결말에 집중된다. 트레버 존스의 비장한 스코어("Kiss")가 배경에 깔린 가운데 희생, 복수, 사랑, 슬픔이 모두 범벅이 되는 결말은 이 영화가 왜 사람들의 기억속에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아 있는지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앨리스 역을 맡았던 조디 메이의 슬픈 눈동자와 더불어.
